추억록의 추억

역시 내래 군인정신이 투철했다!
말년에도 이런 감흥에 젖어 있었을 정도였으니.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와 같이, 군대 시절에 나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고참들 추억록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블로그 초기에나 했고 또한 당시 이웃 블로거들이래 거의 다 떠났으니낀 이제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갔디만.
처음 추억록을 그린 게 언제부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디만서리,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약 11개월(?) 고참의 것을 그려 준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흔치도 않았디만, 또한 요즘과 달리 어릴 때부터 미술학원이니 뭐니 다니면서 자란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전방 근무자는 남부지방 ‘촌놈’덜이 대부분이어서 더욱 그랬다.
어쩌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아니, 군바리!)이 있다 해도 전방 군대에서 주어진 수성볼펜과 사인펜 정도로 충분히 묘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당시 붓 비슷한 펜을 가진 녀석이 있었는데 녀석이 그린 그림은 전혀 군대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런 도구를 갖춘 것도 그나마 내가 갈참이었을 때 얘기이고, 녀석은 내 부조종수의 동기인 다른 중대 녀석이었다. 기래서 그 녀석이 한 두어 점 내 추억록에 그림을 그렸디만 내래 영 내키지 않았고.
내래 어릴 때부터 만화 쪽으로 진화를 한 까닭에 추억록도 온통 만화식으로 그렸는데, 사실 이거이 가장 적합하다. 신문을 봐도 만평이야말로 가장 그 시대상을 잘 표현하지 않는가. 그 한 많은 군대생활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애꿎게 뺑뺑이 돌던 기억.
주차장에서 하루 일과 마치고 내무반에 올라왔더니 인사계가 난리를 친 거다.
사실 내무반에서 있던 건 보병들이었을 텐데 그 보병들은 나가 버린 바람에.

그뿐 아니다. 내래 10대 시절에 가장 큰 취미가 군사 분야라서리 남덜이 지겹다고 하는 군대생활에 있어서도 일촌광음불가경, 모든 것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기에 군대 묘사와 표현이 아주 익숙했다. 물론 군사 분야에 관심이 깊었던 만큼 대한민국 군대에서 보고 들은 게 아닌 외적인 시각도 부여한다.

갑자기 추억록 생각이 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요즘 ‘호국의 달 6월’ 관련 뉴스를 종종 본다는 것. 둘째는 시위대와 전경의 충돌에 대해 옛날과 달리 전경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이도 많다는 것이다. 특히 군필자들은 복무시절을 생각하기도 하고. 셋째는, 엉뚱하게도 인터넷에 흔히 굴러다니는 ‘야한’ 사진덜 때문이다. 기리타고 전라 사진을 말하는 거이 아니고, 기냥 주요 포털 사이트에 뜨는 광고덜, S 라인, 다이어트, 이런 것도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어마어마하게 야한 거다. 사실 거의 구경도 못했디만. 외국 영화에서나 그 정도 노출을 볼 수 있을까?
기런데 고참덜 중에는 기런 야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주문하는 이가 종종 있어서리 오늘 문득 기억이 난 거다. 야한 그림? 글쎄, 상상은 할 수 있디만 제대로 그리기가 쉽진 않다. 여자 몸매를 제대로 그린다는 게 오데 쉬운 일인가?
사실상 몸매는 고사하고 얼굴을 그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녀칠세바늘방석 시대에 그 관념을 존중하면서 자라다 보면 여자 얼굴을 그리는 것조차 쑥스럽다. 기래서리 내래 10대 시절까진 거의 여자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명랑만화 수준이다. 작년에 이곳에 연재했던 만화 <나희와 주배>에 나오는 나희 얼굴, 딱 그 정도 수준이다. 기래서 그 만화를 연재할 때 밝힌 바 있디만 도저히 새로운 만화풍 캐릭터를 창조하기가 힘들었다. 남자 캐릭터는 쉽게 만드는데 말이디. 결국 10대 시절에 강철수 선생 등의 만화 풍에서 익숙해진 기런 ‘구형’ 얼굴로 그린 것이다. 물론 새로 창조를 할 수는 있디만 억지로 만든 캐릭터에는 정이 안 갈 테니낀.
기런데 군대 시절에는 고참덜이 하도 주문을 하니끼니 종종 여자를 그려야 했는데, 거의 실사에 가까운 얼굴과 명랑만화의 중간치 정도로 그렸다. 전에 이곳에 올린 스타워즈 관련 그림을 봐도 내래 명랑만화 정도 수준이 아니라면 여자는 ‘극화’ 풍도 아니고 가능한 한 실물을 스케치 하듯 그렸다. 그나마도 자주 그린 건 아니디만서리.
옛날 군대에서 고참덜 추억록을 그려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일단 기거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 왕고참의 보호막 아래로 들어가게 되니낀. 기리타고 뭐 떡고물이 떨어지는 건 아니디만, 기것만으로도 당시의 군대에서는 크나큰 만족인 것이다. 군인이라기보다는 계속 가두어 둔 맹수나 조폭처럼 포악하고 살벌했던 시절이었으니낀.
하디만 기런 거 말고도, 창작을 하는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거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디만서리, 그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남덜 다 자던 시간에도 ‘의무적’인 반공/보안 포스터 제출이 있을 때면 내래 맡아서 그렸으니낀. 기런 포스터들은 각 소대마다 한 점씩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데, 사실상 장갑차 승무원덜이래 내무반 일에 신경 안 써도 되므로 그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그 ‘밥보다도 더 좋다는 잠’을 빼앗겨 가면서도 하게 되는 기디.
기리케 역대 왕고참덜 추억록을 그려 주다 보니 슬슬 장래를 준비하게 됐다. 내가 제대할 때도 당연히 내가 그려야갔디만(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낀), 이왕이면 체계적으로 그리자. 고참덜 추억록을 그리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덜을 하나하나 목록을 작성해서 남겨 두었다. 그리고 내 추억록은 아예 기획부터 체계적으로 해서 몇 개의 장으로 나누어 만들기로 했다.
또한 다 닳아빠진 사인펜들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사인펜은 종이에 깊이 배어드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색상 표현이 불가능한데, 닳아빠진 사인펜이라면 기거이 가능하다. 기런 사실을 눈여겨보고 모두 모아 둔 것이, 나듕에 내 추억록을 그릴 때는 조금 연한 색에서 아주 연한 색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다음 그림을 보시라!


‘니들펜’이라 불린 수성볼펜과 낡은 사인펜의 절묘한 조화.
누가 이걸 사인펜으로 칠했다고 생각하랴.


결국 내래 왕고참이 되었을 때 슬슬 그 작업에 들어갔는데, 애초 기획한 것은 유례없는 두 권짜리였다. 사실 그 정도를 그리려면 뇌이디어가 참 많이 필요하갔디만 이미 그 이전부터 준비를 한 까닭에 소재가 달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전에 언급했듯이 승무원 쫄다구덜이 보충되지 않다 보니 내래 왕고참이 됐을 때는 정원 34명에 19명뿐이었다. 기래도 예전 같으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비싸던 기름 값이 대폭 떨어지면서, 또한 기계화부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기동훈련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 그만큼 정비도 중시되는데 이거이 인원이 절대로 부족한 거다.
왕년의 고참덜은 열심히 일하는 쫄따구까지 불러 추억록을 그리게 했는데, 내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그저 혼자 그리고 있기도 힘들었다. 보통 말년 3개월 이상은 거의 놀면서 지낸다. 기래서 지루해서 죽으려고 한다. 기런데 내래 내 추억록을 그릴 시간조차 부족했다는 것.
기래도 한 권은 완성했다. 그리고 제2권 작업에 들어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였을 때, 드디어 정비반장이 뿔났다!
“정비 도와주지 않으려면 내무반에나 올라가라!”
에휴!
결국 완성을 보지 못했다. 제대하고 완성을 하려 했디만 기건 의미가 없는 짓! 이미 밖에 나와서 추억록을 그려 봤자 뭐 하나?


대한민국 군대생활을 가장 잘 함축한 만화.
다른 것들은 글 쓴 이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크학학!) 모두 가려 버렸는데
이건 누가 쓴 글인지 이름이 없기에 그냥...

역대 고참덜을 보면 참 답답한 면이 있었다. 너무 근시안이다. 군대 추억록에 군대 얘기(그림)를 많이 집어넣어야 하는데, 사회 향수에 젖어서 온통 기런 것 위주로 주문한다. 혹은 야한 것.
물론 민간 세상을 그리는 마음이야 이해하디만서리, 쫄따구도 아니고 곧 제대할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이 짧은디. 제대하면 사회는 실컷 맛보디만, 군대는 영원히 쫑이라는 것. 기런데 추억록에 군대가 아닌 사회 모습이 우글거려서야, 이거 오데 쓰갔나?
군대 내무반에서 짧은 TV 시청 시간을 통해 군바리덜이 즐겨 보는 것은 쇼나 기타 등등, 사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다. 기런데 내래 전쟁 드라마를 더 보고 싶은데 채널 선택권이 없었다는 거이 아쉬웠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전쟁물을 보고 싶다니, 정말 지독한 군인 체질이었던 거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군대생활이 아니라,
군대를 표방한 깡패집단(독 오른 사병),
그리고 비리집단(보급품 횡령하는 윗대가리들)이었다.
만약 육군 규정에 따라 밥 정량대로 주고,
그래서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고,
군기 잡는답시고 필요 이상으로 굴리지 않고,
여차하면 ‘집합’ 시켜서 뺑뺑이 돌리거나 살벌하게 굴지 않고,
진짜 군대다운 군대였다면,
내래 그 3년이 즐거웠을 거다.
기냥 소림사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생각하면 되니낀.
군대는 운동선수 합숙소 같은 분위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한민국은 정반대로
학교나 운동선수들조차도 왕년의 깡패집단 군대 냄새를 풍긴다.

by jushin | 2008/06/09 17:36 | 기분테마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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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6/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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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6/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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