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코미의 순정
그리고 얼마 뒤에는 실제로 살얼음이 얼었다.
첫 눈이 내려 그 위를 하얗게 덮었다.
살얼음은 점점 두꺼워졌고 이내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은 얼음판이 되었다. 아이들은 좋아라, 하면서 썰매를 타고 미끄럼을 즐겼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하나도 즐거울 리가 없었다.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가끔 살구나 수코미가 찾아와 부르면 솔이나 이모에게 나 없다고 하라고 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솔이 녀석이 어느 날 망쳐 버렸다.
“헝아가 없다고 그러랬어.”
그 뒤로는 아예 솔이는 제쳐 버렸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차라리 대답을 하지 않고 장롱 뒤에 숨었다. 녀석들이 내 고무신을 발견할까 봐 감추어 버렸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나중에는 답답해서 살구네 쪽 눈치를 살피고는 재빨리 집을 빠져 나와 멀리 달아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눈이 하얗게 덮인 산 속을 걸으면서 스스로를 꾸짖고는 했다. 바보. 멍청이. 바보. 멍청이. 왜 그딴 소릴 해 가지고. 내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너무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정말 그건 내가 뜻한 게 아니었다. 난 절대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자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 나는 그런 말을 마음에 담고 산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가장 친한,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고 사귄, 계집아이가 반디였으니까. 그런 내가 부자를 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몸이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반디는 오해를 한 것이다. 어쨌건 오해를 할 만도 하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근데 왜 난 그런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이 형한테 그런 말을 들었나? 결이 형한테 배웠나? 세상 돌아가는 꼴 하나도 모르고, 그저 이상에만 사로잡혀 사는 결이 형한테?
그러고 보면 참 복잡했다. 수코미를 비롯한 우리 회사 직원들은 모두 가난하다. 그리고 모두가 현실주의자이다. 물론 통일을 막고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 많은 실업자를 구한다는 건 이상주의일지 모르지만, 그것도 현실을 위해서다. 당장 배고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에 비해 결이 형은 정말 꽉 막힌, 모순 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이다. 자기가 학교에 다니고, 자기가 좋은 옷 입고, 자기가 축음기에 외국 음반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집이 부자인 덕분인데, 그런데도 부자들을 흉본다. 아니, 부자들을 흉본 건 아니지만, 자기 아버지 사업을 욕한다. 자기 아버지가 그런 사업을 안 하면, 자긴 어떻게 그 모든 걸 누릴 수 있단 말인가.
반디네 집은 또 다르다. 굳이 이상이니 뭐니 하는 데 매여 있는 것 같지 않다. 가장 부자이면서, 그냥 가장 단순하게 사는 듯하다. 현실을 그대로 잘 따라가고, 그래서 고민도 없는 듯하다. 단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
그렇게 수코미나 그밖에 가난한 사람들, 부잣집 아들이면서 자기 아버지를 욕하는 결이 형, 더 부자이면서 그냥 마음 편하게 사는 반디네 집, 정말 세상은 구구각각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 거지?
그건…… 돈이 없어서 고보에 진학하지 못하고, 이렇게 날마다 헤매고 있으니까 당연히 가난한 사람 쪽?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주식회사를 이끌고, 작전을…… 펼…….
아니었다. 알고 보면 결국 나는 결이 형과 같은 부류였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나섰으면서도, 또 나 자신이 그들에 속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 엉뚱한 일로 고민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평화통일을 막아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두 나라를 이간질해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은 거꾸로 가고 있다. 나는 반디에게 묶여서 그걸 바라지 않는다. 맞다. 결국 나도 결이 형과 같은 부류이다. 나도. 나도. 나도!
갑자기 마음이 격해진 나는 옆에 보이는 소나무를 힘껏 들이박았다. 눈앞에 불빛이 번쩍였고, 그것이 사라지자 곧 어두컴컴해졌다. 이어 다가온 것은 끝없는 통증이었다.
산허리를 끼고 눈에 푹푹 빠지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몬지네 집 근처까지 와 있었다. 동쪽으로 보이는 언덕을 넘으면 회사로 통하는 길목이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그쪽을 외면하며 계속 걸었다.
“어! 별비야!”
문득 들려오는 소리. 그 낯익고,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몬지가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지게에는 불쏘시개로 쓸 자잘한 나뭇가지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몬지야!”
울컥하는 느낌에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여긴 웬 일이냐?”
몬지는 더덕더덕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지만 조금도 밝은 기색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팔을 툭 쳤다.
“웬 일이긴? 날마다 지나다시피 하는데.”
“그래? 근데 니 얼굴 본 지가 한 달은 넘은 거 같은데?”
“그거야, 서로 마주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게 그거지, 뭐.”
녀석이 무거운 지게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안 되어 보여서 내려놓고 얘기하자고 하려다가, 아무래도 이곳은 눈밭이었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니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어? 그, 그게…….”
“응? 왜?”
“이거 곰바우 돌배네 집에 갖다 줘야 하걸랑.”
속에서 좌절에 가까운 탄식이 터졌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미안.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얘기하자. 나중에, 진짜로!”
그렇게 말하고는 몬지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지게를 짊어지고 눈에 푹푹 빠지면서도 힘차게 걸어가는 녀석의 모습은 언제 봐도 티 하나 없이 밝아 보였다. 그런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곰바우? 그 먼데까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번에 살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미련한 자식. 하여간 저 돌대가린 사서 고생을 한다니까.’
그래. 몬지는 돌대가리다. 하지만 어쩌면 나보다 낫다. 아무런 근심도 고민도 없이 잘 살고 있으니까.
몬지네 집을 지나 계속 산허리를 따라 걸었다. 참호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덮인 참호는 언뜻 보기에는 구분이 안 되었지만 워낙 이곳을 많이 지나다닌 내게는 눈을 감아도 훤했다.
동쪽으로 이어지던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휘었고 따라서 내 발걸음도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계속 가다 보면 집이 나오겠지.
그렇게 얼마쯤 걷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나는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가까운 밤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달래네 집 뒷산이었다. 거기에 사람으로 보이는 시커먼 형체가 있었다. 키로 볼 때 아직 아이였다. 그 아이 역시 나처럼 밤나무 뒤에 숨어 달래네 집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그 아이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뺐다. 나무에 바짝 붙어 동정을 살피다가, 다시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수코미는 몇 번 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재빨리 달래네 집을 향해 내려갔다. 발걸음도 빠르게 달래네 뒤뜰에 도착하는가 싶더니 장독 사이에 뭔가를 내려놓고 재빨리 달아났다. 저만치 가다가 걸음을 멈춘 녀석은 손을 가슴에 얹었다. 아마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열심히 쓸어내리고 있을 거다. 그 마음, 내가 다 안다. 이제 나도 잘 안다. 어쩌면, 너보다도 더.
뒤를 힐끔 돌아보고, 다시 주변을 살피던 수코미는 재빨리 산을 오르다가 교통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호를 따라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는 나무 뒤에서 나왔다. 천천히 달래네 집으로 다가가, 장독대 사이에 놓아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달걀이었다. 달걀 세 개.
꾹 다문 입에서 웃음이 터지려 하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그 바람에 몸이 들썩거렸다. 어느새 웃음은 애달픔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억지로 참았다.
집으로 향하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래. 그래도 수코미 네가 나보다 낫다. 나보다 백배 행복하다. 넌 그래도 너에게 어울리는 계집앨 좋아하니까.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바로 옆 마을에 사는 계집애를 좋아하니까. 또 그 계집애는 너와 신분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넌 행복한 거다. 나보다 백배는.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동안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면 온갖 상상을 다 했었다. 다시 반디를 만나 함께 여름날의 풀밭을 거닐고, 함께 풀꽃을 꺾고, 또 함께 숲에서 노래도 부르는, 즐거운 생각들을. 비록 수코미가 지금 당장은 달래와 어울리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녀석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처럼, 나 역시 다시 반디를 만날 거다. 분명히 다시 만날 거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 어울리면서, 봄이면 버들강아지들을 훑어서 반디 머리에 뿌려 주고, 여름엔 아카시아 잎으로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가을엔 단풍놀이, 낙엽 밟기, 겨울엔 눈사람 만들기……. 또…… 함께 선녀 놀이터에 놀러가서, 숲에 둘러싸인 빈터에서, 둘이 양손을 맞잡고, 강강술래, 강강술래…….
날마다 그런 생각에 젖다 보니 때론 꿈속에서 반디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깜깜한 밤에, 그 큰 저택 앞에 서서, 반디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눈부신 전등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아니, 꿈속에서조차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 저택이 풍기는 웅장한 분위기에다가 반디 아버지의 지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저택 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내가 본 중에 가장 좋은 집은 마리내 읍내에 있는 결이 형네 집이었다. 하지만 결이 형 집은 겉모양은 서양식이었지만 내부 구조는 동양식이었다. 대청마루에 방바닥 생활. 그런데 서양에서는 침대와 의자 생활을 한다. 커다란 서양식 저택 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그 동안 영화를 여러 편 봤지만 그런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반디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날 꿈에서는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반디가 혼자 저택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반디의 한쪽 손에는 들에서 꺾은 풀꽃들이 들려 있었다.
열린 현관문 안쪽은 너무나도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저택 내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반디는 그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그 어둠의 장막이 반디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니, 잠겨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소리쳐서 반디를 부르려다가, 혹시나 누구에겐가 들킬까 싶어 그만두었다. 방첩대 사람들이 쫓아올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허둥지둥 뛰어 쫓아갔지만 이미 현관문은 반디의 등 뒤에서 닫힌 뒤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꿈속이니까 열쇠가 없어도 문을 열 수 있겠지만, 나는 감히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택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서 꿈속에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저택의 높은 창문을 바라보며 혹시나 반디가 내다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디는 창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창문 아래로 다가가서, 두껍고 단단한 화강암 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 반디가 피아노를 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풍금 소리는 잘 알지만, 피아노는 풍금과는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차라리 그 사실을 몰랐으면.
차라리 피아노나 풍금이나 거의 똑같은 걸로 알았다면.
그랬다면 꿈속에서 반디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을.
그것이 진짜 피아노 소리가 아니라고 해도.
다시 회사에 출근한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전날 친구 두 녀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해도 가장 밝고 가장 해맑고 가장 행복한 녀석, 몬지. 그리고 비록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계집애를 끝까지 좇는 수코미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러기에 다시 힘을 내어 회사에 나간 것이다.
회사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새 또 내린 눈 때문에 발자국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니 희미한 자국은 남아 있는 것이, 아마도 최근에 누군가 다녀간 것 같았다. 지난번에 눈이 내린 게 그저께였으니까, 어제 아니면 그저께쯤 다녀간 듯했다. 아니 어쩌면 녀석들은 이곳에 거의 매일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창고로 다가가 반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누가 있을 턱이 없었다. 새로운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멍하니 창고의 어둠 속을 지켜보고 있을 때,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왔냐?”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니 메두와 종개가 거기 서 있었다. 의외로 녀석들의 얼굴은 밝았다. 종개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별비 너, 사장 자리를 박탈한다.”
“뭐?”
“농담이다, 농담.”
메두가 다가와 내 팔을 툭 치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회사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사장.”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이 파묻힐 정도로 큰 녀석의 손은 두툼하기까지 해서 무척 듬직했다. 이어 종개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근데, 다른 애들은…….”
내가 몬지네 집으로 향하는 저편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묻자 메두는 대답했다.
“수코미는 곧 올 거야.”
“살구는?”
“요즘 땔감 하랴, 뭐 하랴, 좀 바쁜가 봐. 우리도 좀 그런 편이지만, 아무래도 살구는 더 하겠지.”
이제 살구도 몬지와 같은 길을 가는 걸까? 어쩌면 그 길이 훨씬 마음 편하고 행복한 길인데.
“왔구나!”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수코미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언제 마련했는지 한쪽 구석에는 장작과 불쏘시개가 제법 쌓여 있어 모닥불까지 피워서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 모닥불 속에 종개가 밤과 고구마까지 묻었다.
“다시 작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밤이 탁탁 튀는 소리를 낼 무렵 메두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
“니가 돌아오면.”
“그럼, 매일 여기 모였던 거야?”
“매일 이맘때면 와서 확인했지. 니가 없으면 그냥 우리끼리 놀다가 돌아갔고.”
“그렇구나.”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만 연거푸 끄덕거렸다.
“좀더 세게 나가기로 했어.”
메두가 침묵을 깨뜨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 지금까지도 잘 해 왔지만, 이건 너무 진도가 느려. 인제 겨울이 끝나면 새해가 되고, 곧 쥬신 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잖아. 그러니까 좀더 세게 나가야 돼.”
“어떻게?”
“아직 자세한 얘긴 안 나왔지만, 지금까지 하던 방식은 버려야 한다는 거지. 좀 무력을 사용해야 할 거 같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력은 안 돼. 거기 민간인들 좀 습격한다고 뭐가 되겠냐?”
“그런 무력이 아니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폭력?”
아무래도 배운 게 부족한 만큼 우리들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작전을 시작할 때 ‘교란작전’이라는 엉뚱한 표현을 쓴 것처럼. 물론 결국은 교란작전이 되고 말았다. 쥬신 정보당국에서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해 무척이나 혼란을 겪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한 실질적인 교란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쉽게 무력이라고 하자. 폭력은 아무래도 사람을 팬다는 뜻 같으니까.”
“그래.”
“그렇게 하자.”
내 말에 직원들이 동의했다.
“근데 어떤 무력인진 생각해 봤어?”
“가장 간단한 거. 불을 지르는 거지.”
“불?”
“그래. 그거보다 좋은 게 어딨냐?”
종개가 흥이 나서 말했다.
“어디다?”
“아무 집이나. 닥치는 대로.”
“너무 심하면 위험해.”
“마구 불을 내자는 건 아냐.”
수코미가 설명했다.
“가끔 한 집씩 태우는 거지. 그것도 웬만하면 사람 사는 집 말고, 헛간이나, 아니면 좀더, 할 수만 있다면, 관공서 같은 데다 불을 지르는 거야.”
금세 내 얼굴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공서라니,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걱정 마. 우린 불을 지르고 잽싸게 빠지면 돼. 우리가 한 짓인지 모르게 말야. 우리도 될 수 있으면 안전한 쪽으로 하려고 노력한다구.”
메두가 설명을 보탰지만 그 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나는 곧 지적했다.
“우리가 한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우리가, 남쪽에서 한 짓이란 걸 알아야지.”
“꼭 그렇진 않지.”
수코미의 말에 돌아보니 녀석은 뒤를 이어 설명했다.
“그 얘긴 벌써 전번에 했었잖아. 평통반 말야.”
“뭐? 평통반? 아아!”
그제야 녀석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수코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계속 평통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그럼 우리가 한 짓인 줄은 몰라도, 어쨌건 발칵 뒤집히는 거지. 평통반도 어차피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데니까. 우연히 난 불이 아니라는 게 중요한데, 몇 번 평통반 표시를 남기면 금세 눈치를 채겠지.”
그럴 듯했다. 언제나 잔꾀를 내어 난관을 잘 헤쳐 나가는 수코미였다. 녀석의 말을 믿기로 했다. 우리는 꼬맹이들을 시켜 숯과 화약 같은 것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해 보라고 했다. 총알 같은 게 있으면 함부로 분해하지 말고 가져오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런 건 그쪽에 능숙한 메두나 종개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물론 살구가 올 수 있다면 더 좋을 거고.
그렇게 해서 며칠에 걸쳐 우리는 불쏘시개를 마련했다. 작전예정일도 잡았다. 다음번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로. 아무래도 사람들 시야를 가리고 발자국을 감추려면 그런 날이 좋았다.
꼬맹이들 중에는 쥬신 쪽 집들이 훨훨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같이 가고 싶어하는 녀석도 있었다. 처음 작전이 시작될 때는 국경을 넘는다는 말에 그토록 겁을 집어먹던 놈들이, 우리가 몇 차례고 뻔질나게 국경을 드나들자 간덩이가 부은 것 같았다. 피롱이는 자기도 대령이니까 같이 가자고 보챘지만 사장의 권한으로 엄격하게 거부했다. 그럴 때면 내 머리에 쓴 철모를 손짓해 보이며 권위를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나는 창고 문 옆에 석필로 크게 글씨를 썼다. 위에서 아래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니, 석필로 써서 조금은 엉성하게 보였지만 더 없이 멋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주식회사’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코미가 물었다.
“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뭐가?”
혹시나 작전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인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 수코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걔, 반디.”
반디. 한동안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 했지만 결국은 그럴 수 없었던 이름이었다. 잠자리에만 누우면 끝없이 떠올라 나를 괴롭히던.
“우리가 반디에 대해서 한 마디도 묻지 않은 게 이상하지 않았어?”
“하긴, 좀…….”
“눈칫밥 십 단이다. 니가 마지막으로 반디를 만나러 간 뒤로 아무 말도 없고, 회사에도 안 나오길래 대충 짐작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 챘지. 아무래도 우리가 너보다 두 살이나 윈데, 그런 경험이 없었겠냐? 사실 메두하고 종갠 좀 달라서 여자 문제로 고민할 정도는 아니다. 메둔 아직 여자에 별 관심이 없고, 종갠 여잘 밝히긴 하지만 그냥 쉽게 동네 기집애들하고 어울려 노는 식이래. 우리한테 비하면 한참 단순하고 속 편한 거야.”
우리. 무슨 말뜻인지 알겠다.
“그래서 내가 설명했어. 니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니가 훌훌 털고 다시 나오길 기다린 거다. 그리고 이왕 일이 틀어진 거, 좀더 세게 나가기로 했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 속도를 내어 조금 앞서 걸었다. 수코미도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음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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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답장들. 전쟁주식회사 - 수코미의 순정.
‘나팔꽃아가씨’ 08.03.02 08:29 “이름 : 고미 → 수코미” cf. 「이름의 바뀜: ... 개미 ... → ... 수캐미 ...」 -왠지... 어쩐지... 고‘미’가 개‘미’(와) 같고... ‘수’코‘미’가 ‘수’캐‘미’(와) 같네요. -발음부터가 비슷하네요! 의미(까지)도 비슷할 듯.....more
아,.. 아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너진 사아랑탑아^^~
겉으로는 묵묵하면서 내적으로 느낌이 우러러나오는 모습을 볼 때입네다.
등장인물이 상투적으로 형식적으로 감정/감동을 드러내면 아무 느낌도 오지 않디요.
차라리 꾹 참은 눈물을 남 몰래 조용히 흘리는 사람을 볼 때, 속으로 조용히 웃음 짓는 사람을 볼 때
진짜 묵직한 감동이 배어나고요. (누구라도 기럴 겁네다.)
여기서 수코미가 남 몰래 '그런 행위'를 하는 것으로 그린 것도 그 때문입네다.
몇 줄로 중얼중얼 얘기했디만 고로쇠 님이 흥얼거리는 노랫말 첫 한 문장이 훨씬 함축적이디요.
"사나이 우는 마음 그 누가 아랴" 이거이 백 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야기하디요.
기런데 고로쇠 님이 갑자기 감흥이 살아나는가 봅네다.
가끔 그곳 블로그에 올리는 옛 노래덜이 문득 생각나누만요.
별비의 꿈 얘기는 최근에 추가된 것인데, 크나큰 상징성을 띠고 있디요.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저택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꿈에서조차 문을 열지 못한다.'
'차라리 피아노와 풍금 소리가 다르다는 걸 몰랐다면, 꿈속에서 풍금 소리라도 들렸을 것을.'
이거이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아옹거리는 분단/반공 이데올로기를 빗댄 겁네다.
이놈의 나라는 분단 후 회갑까지 넘기면서, 이제는 병적인 '빨갱이 자라 솥뚜껑 증세'가
거의 고착화, 유전화 되어 가는 듯합네다.
뭐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빨갱이...
매카시즘의 유령은 저승에도 안 가고 영원히 이 반도 위에 떠돌 것인지...
cf. 「이름의 바뀜: ... 개미 ... → ... 수캐미 ...」
-왠지... 어쩐지... 고‘미’가 개‘미’(와) 같고... ‘수’코‘미’가 ‘수’캐‘미’(와) 같네요.
-발음부터가 비슷하네요! 의미(까지)도 비슷할 듯하네요...
가정: ‘고미’가 「개미」이고, ‘수코미’가 「수캐미」이다.
결론: ‘달래’는 ㅁㅇ‘은 먹보’ – ‘껌쥬’이다. 정말? ㅋㅋㅋ
http://blog.empas.com/chemi1st/read.html?a=22932486
“이름 : 고미 → 수코미”
“의미 : 거미(경기북도 발음) → 수커미(수거미)”
“용도 : 작품 이해 돕기, 결말의 한 방”
http://blog.empas.com/jushin/read.html?a=26373000
-발음까지만 비슷하네요! 의미는 안 비슷하네요...
“수코미의 순정”
“이번 회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고미’였던 이름을 나중에 ‘수코미’로 바꾸었다고 전에 인물 소개에서 밝힌 바 있는데, 어떤 종류의 거미 수컷(수거미=수코미)는 암컷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가 잡은 곤충을 거미줄로 돌돌 잘 포장해서 선물하는 녀석이 있다고 하죠.”
http://blog.empas.com/jushin/26706016
-습성(?)이 조금은 닮았네요...!
-‘나팔꽃 아가씨’
“프로필”
이름의 바뀜: chemi1st(♂) → ‘케미님’ → ‘개미님’ → 개미( named by ‘jushin’) → 개미군 → 개미양 → 수캐미(♂) → 병정 개미(♂) → 일개미(=암캐미)(♀) → 여왕 개미(♀) → 공주 개미 → 여왕 개미의 딸 → 개미의 딸(♀) → ‘매미외동딸’ (named by jushin) → 개미의 딸(♀) → ‘사이버 개미’ (named by jushin) → 개미의 딸 (from 0319) → ‘나팔꽃 아가씨’ (from 070923일).
http://blog.empas.com/chemi1st/guestbook/list.html
-(이름만; )개미였었다가, 수캐미가 되었었지요. 지금도 (사람은 )여전이 개미, 수캐미, ...이(기는 하)지요. 080302일0759.
-단어들 간에 발음의 유사성은 의미의 유사성과 관련성이 있다. 발음의 유사성으로부터 의미를 유추하(여내)ㄹ 수 있다. 기존의 기지의 단어와 발음의 유사성으로부터 신규의 미지의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여내)ㄹ 수 있다.
-이름은 소리가 닮았으면 뜻도 닮았다. 이름은 소리가 비슷하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 이름의 지시적인 의미, ...도 비슷하다.
=원인: 새(로운) (낱)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때에 새(로운) (낱)말의 뜻을 알아차리기 쉽도록, ..., 의미를 파악하기 용이하도록, ... 편의상 일부러 그렇게, 옛말과 소리가 비슷하게, ..., 기존의 기지의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도록, ...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때에 뜻이 기존의 옛말의 뜻과
≡‘원인과 결과’: 말은 뜻이 비슷하면 소리도 비슷하게 만들기 때문에; 말은 소리가 비슷하면 뜻도 비슷하다. 080302일0804.
경기북도에서도 개미는 개미로 발음하니 말이디요.
'고미'라는 이름을 설정한 이유는 오직 하나, 본래 한국어(사투리 발음)이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니까
가상 국가(세계. 동아시아. 실제로는 한국)에 적절하므로 사용한 겁네다.
'몬지' 또한 같은 이유로 사용한 이름이디요.
[어→오]라는 발음의 차이를 빼면 경기북도 말과 표준어 사이엔 두드러지는 차이가 없디요.
단, 억양은 많이 다릅네다. 평안도 영향을 받았지만 좀 가벼워서리 종알종알 하는 말투를 쓰디요.
(이거이 서울 서방 및 남방 경기 지역도 마찬가지더만요.)
다만 작품 소개에서도 썼듯이 '감흥'과 '정서'에는 개미 님이 크게 느낌이 통할 거란 생각은 했디요.
근래 제가 아는 사람 듕 이성에 대한 사랑(분류하자면 '에로스적'인 쪽이디요)에 몰입해 있는 사람은
개미 님 하나뿐이니 말입네다. 오죽하면 사랑을 소재(주제)로 한 SF/환상 단편 시리즈에
[사랑에 빠진 개미]라는 제목을 붙였겠습네까. 크학학!
진정으로 상대방에게, 혹은 제3자에게 감동을 주는 사랑이란(꼭 사랑이 아닐지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기디요.
이번 장에서 수코미가 보여준 것처럼, 적극적이면서도 상대가 모르도록 몰래 하는 것.
눈에 띌 정도로 쫓아다니면 이미 상대는 '스토킹'이라고 생각한다지 않습네까? 특히 요즘 세상에서는 더욱 더.
중학교 때 배우는 한국 가곡 중에 <그 집 앞>은 이성을 몰래 사모하여 눈치 안 채게 '맴도는' 내용을 그리고 있디요.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디요.
그러나 조바심을 가지고 집착을 하면 상대는 그만큼 뒷걸음질을 하디요.
수코미도 기걸 알기 때문에 절대로 달래 앞에선 내색을 하지 않는 겁네다.
그저 묵묵히 행할 뿐.
이거이 참 듕요한 겁네다.
아니면 아예 "적이 내 의도를 모르게" 감추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며 효율적이디요.
의도를 눈치 채는 순간 상대는 '재기' 시작하니 말입네다.
"영업을 하려면 영업이 아닌 척 하고, 사랑을 하려면 사랑이 아닌 척 하라." <= 와! 명언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