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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 고독한 영웅, 맨손의 라은보
바로 옆의 풀숲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뭐지?
바짝 긴장을 하는 순간, 은보는 대뜸 노루부터 떠올렸다. 노루가 아닌 다른 것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쥐? 그건 너무 작았다. 그럼 너구리? 그것도 작았다. 적어도 사람 정도 크기로 느껴지려면 노루가 적당하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멧돼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멧돼지 역시 위험한 존재가 아닌가. 그 위협적인 존재, 북한군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떠올린 다른 동물이 멧돼지라면, 그 역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젠장! 결국 떠올리고 말았다. 제발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기를, 발을 들여놓지 말기를 바랐는데. 망할 놈의 멧돼지 때문에 결국은……. 아니, 노루일 거야, 분명히.
하지만 그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은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루도 아니고 멧돼지도 아니었다. 시커먼 얼굴을 한 그것은, 북한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 발을 들여놓은, 진짜 북한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은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동시에 그의 의식도 춤을 추었다. 몹시 격하고, 몹시 혼미한 춤을.
“라은보!”
“예, 일병 라은보!”
대대장의 호명에 은보는 힘차게 복창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알았지?”
“예, 알았습니다!”
대대장은 수색정찰을 나가는 병사 여덟 명 앞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격려하고 있었다.
“군대생활 한 지 얼마나 됐나?”
“예! 팔 개월 됐습니다!”
“팔 개월이면, 이제 제법 군대 돌아가는 걸 알겠군?”
“예, 그렇습니다!”
“근데 왜 성이 ‘라’씬가? ‘나’씨가 아니고 말이지. 이전에 헌법재판소에서 ‘류’씨가 두음법칙에 의거해서 불법으로 판정 난 거 모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잘못이 아닙니다!”
“자네 잘못이 아니라고?”
“예! 부모님이 그렇게 붙여줬을 뿐입니다!”
“하하! 그 패기 마음에 들었어.”
대대장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은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개개인에 대한 격려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간 대대장은 짧게 훈시했다.
“비록 남북이 상호 교류하고, 금강산 관광까지 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분대원 여덟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아무리 친한 듯이 보이는 나라도, 어느 한 순간에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과거 중공과 소련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적의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들과 수교를 맺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긴밀한 관계가 되어 있다. 그 반대도 언제든 가능하다. 아무리 친한 국가도, 등을 돌리는 순간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순간도 여러분의 임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간략한 훈시를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대대장은 그 특유의 농담을 써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밥들은 든든하게 먹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좋았어. 금강경도 식후라고 했다.”
“금강경, 식후입니까?”
가장 고참인 신호 병장이 물었다. 일개 사병이 대대장의 농담을 물고늘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이번 대대장 박정무 중령만은 달랐으니까.
한순간 대대장의 모습이 흐느적거리는가 싶더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군인이 아니라, 마치, 중절모를 푹 눌러쓴 민간인처럼, 일반인치고는 어딘가 이상하게 보였지만. 왜 이러지? 어제 저녁에 텔레비전을 너무 봐서 그런가? 아니면, 따가운 햇볕 때문에?
남들이 눈치를 채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흔들어 그 이상한 느낌을 떨쳐냈다. 동시에 대대장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래, 신 병장. 그 긴 금강경을 낭송하려면 배가 고플 게 아닌가. 그러니 밥을 먹어야지. 또한 불교는 몸의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약간은 나른한 듯한 자세가 좋다. 부처님 눈이 반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식후야말로 금강경을 낭송하기에 좋지 않겠는가?”
“그렇쉽니다!”
신 병장은 익살맞은 말투로 힘차게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라은보?”
누군가의 외침에 은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눈은 이미 떠져 있었고, 다만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갈대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고참병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주현 병장과 신호 병장이었다. 그 너머로는 다른 동료들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주경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 갑자기 미쳤어? 누가 총질하랬어?”
이주현 병장이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은보를 질책했다.
“이 자식이 정말……. 야! 철수다, 철수! 다들…….”
이 병장이 분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였다.
“잠깐!”
문득 신 병장이 이 병장 어깨를 잡았다.
“예?”
“총소리가…… 달랐어.”
“그게 무슨…….”
“케이투 소리가 아니었다고.”
이 병장의 눈이 은보를 향해 돌아왔다. 신 병장도.
이어 그들의 눈길은 은보의 정면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수풀 속에 쓰러져 있는 북한군 복장의 병사 하나를. 얼굴에 시커먼 위장을 한 적병을.
“총을 쏜 건 적병인데, 오히려 쓰러진 것도 그놈이다?”
중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대대장이 말했다.
“어쨌건 수훈을 세웠어.”
“그건 그렇습니다, 대대장님.”
중대장은 대대장을 돌아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천천히 대대장이 다가와 은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숨어서 기습하는 적을, 게다가 총까지 쐈는데 오히려 자네가 쓰러뜨리다니, 정말 대단해.”
대대장은 만족한 듯 연거푸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대 전체가 은보의 무용담으로 떠들썩했다. 곧 훈장이 수여될 것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병사들은 여차하면 은보 주변에 몰려들어 그 당시의 상황을 묻고는 했다. 하지만 은보로서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쓰러뜨렸을 거야.”
신 병장이 말했다.
“저 녀석이 쫄따구라서 평소 입을 다물고 있어 그렇지, 아마 사회에서 한 가닥 하던 놈 같아.”
“야, 라은보! 너 무슨 무술 배웠어?”
누군가 물었지만 은보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질문에 답변한 것은 신 병장이었다.
“꼭 무술을 배웠다고 싸움을 잘하는 건 아냐. 싸움은 감각이니까. 물론 무술까지 했다면 더 도움이 될 테지만.”
은보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신 병장은 계속했다.
“아마 이놈이 고참이었다면 자기가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할 걸? 근데 쫄따구라서 매일 억눌려 지내다 보니까 자기 발산을 못한 거고, 결국 이번에도 거의 무의식중에 해치운 셈이지. 안 그래, 라은보?”
“예, 그렇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무술을 배운 적도 없었고 특별히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을 칠 때면 종종 영화에서 본 무술 흉내를 내고는 했으니까.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재빨리 적탄을 피하면서 상대의 급소를 찌른 것 같았다.
죽은 적병의 몸에서는 어떠한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부검 결과가 있었다. 따라서 은보가 무기를 사용한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주먹을 쓴 것도 아니고, 손끝으로 적의 목이나 명치 같은 급소를 찌른 것도 아님에 분명했다. 때문에 은보는 순간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내공의 힘으로 적을 쓰러뜨렸을 거라는 얘기들이 오갔다.
은보 자신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외의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훈장을 받고 포상휴가를 다녀온 뒤에, 강연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면 기억에도 희미한, 혹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순간의 상황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적병이 총을 쏘는 순간,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어 한 걸음 다가서면서, 적병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격하고는, 그 반동으로 뒤로 물러선다. 그 충격파에 의해 적병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만다.
나름대로 둘러댄 그의 억측이 꼭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 부검 결과에 의하면 적병은 심장에 충격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했다. 그 뒤로 ‘맨손의 라은보’라는 별명이 그에게는 따라다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열심히 무용담을 강연하기 위해 이런저런 부대를 떠돌다가 모처럼 자대에 들른 은보는 동료들이 잡초제거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동료들은 그에게 악의 없는 농담을 해댔다.
“모처럼 오신 손님이 이런 잡일을 해서야 쓰나?”
“낫질은 우리 같은 촌무지렁이들이나 하는 거지.”
“그보다는 맨손의 라은본데.”
“에이, 신 병장님도.”
쑥스러워진 은보는 어쩔 줄 몰랐다.
“어? 왜 이러십니까, 라 병장님? 같은 병장끼리 말 놓자구요.”
사람 좋은 신 병장이 익살을 떨었다.
은보는 침투하는 적병을 잡아낸 공으로 2계급 특진을 해서 병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가 그런 만큼 상병 계급의 고참병들에게도 깍듯이 예우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의 한 내무반에서 지낼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저, 라 병장님?”
동료들과 농담을 끝내고 열심히 풀을 베고 있을 때, 이번에는 농담을 좋아하는 손 상병이 다가와 장난을 쳤다.
“어떻게 하면 저도 라 병장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에이, 손 상병님도……. 장난치지 마세요. 말 놓으세요.”
“아니, 그래서 묻는 겁니다. 저도 한 놈 잡으면 하사로 특진할 거고, 그럼 말을 놓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결국 은보는 웃음을 터뜨렸고 손 상병도 깔깔대고 웃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손 상병이 마구 팔을 흔들어대며 웃는 바람에 들고 있던 낫이 은보의 팔뚝을 스쳤고, 가벼운 상처가 났다.
“어, 이런!”
깜짝 놀란 손 상병이 달려들었다.
“괜찮아? 어디…….”
손 상병은 은보의 팔뚝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상처가 어떤지 보기 위해서. 다음 순간,
“어어…….”
손 상병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은보는 그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어? 손 상병님!”
그의 외침을 들은 동료들이 달려왔다.
손 상병은 의무실에서 깨어났다. 아마도 가벼운 빈혈을 일으킨 것 같다는 검진 결과가 나왔다. 혹은 일사병일 수도 있다고 했다. 병사들에게는 뙤약볕 아래로 나갈 때 필히 모자를 착용하라는 지시사항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날 밤, 의혹에 싸인 은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내무반에 누워 있기가 답답해 중대 행정반 옆의 간이숙직실에 가서 앉아 있었다. 손 상병의 졸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 도대체가…….
다시 한 번 팔뚝을 들여다보았다. 피딱지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흉터조차도 없었다. 다만 아주 희미한, 오래 전에 생긴 듯한 상처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다쳤던 게 맞나?
너무나도 이상해서 계속 고개를 저어댔다. 물론 그 자리에 상흔은 남아 있었다. 언제 다친 것인지도 모르는, 어쩌면 아주 어렸던 시절에 다쳤을 법한 그런 흔적만이. 하지만 분명히 손 상병의 낫에 다쳤는데…….
어쩌면 자신도 더위를 먹어서 헛것을 본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도가 심했으면 손 상병과 함께 입원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상처는? 이 상처는 뭐지?
나름대로 짜 맞추어 억지 추정을 해 보았다. 아마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쩌다 팔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졸도를 했고, 나중에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그 사실을 잊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상흔만이 남은 것이다. 그런데 어지러운 뙤약볕 아래서 슬쩍 낫에 스치는 순간 그 당시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되살아나 환영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추정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손 상병은 뭔가? 손 상병도 내 팔뚝에 흐르는 피를 보고 달려들지 않았는가. 그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백 번 물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열쇠는 손 상병이 쥐고 있었다.
다음날 은보는 손 상병에게 넌지시 전날 있던 일을 물어 보았다. 제 팔뚝에서 피가 나는 거 분명히 봤죠? 어? 그, 그래. 맞아. 근데 피는 고사하고 아무런 상처도 없어요. 뭐? 그럼…….
하긴 손 상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에도 피가 묻은 흔적은 없었다. 분명히 은보의 팔뚝에 흐르는 피를 만졌었는데, 의무실에 입원했을 때 그의 손에는 핏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손 상병과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나름대로의 답을 도출해 냈다. 먼저, 은보 자신의 착각은 자신의 추정 그대로이고, 손 상병이 헛것을 본 것은 자신이 실수로 낫을 휘둘렀다는 것, 그 바람에 혹시 은보가 큰 상처를 입었을까 크게 놀랐다는 것, 거기에 겹쳐진 빈혈, 그런 것들이 뒤엉켜 그 역시 은보가 피를 흘리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그 이상의 억측은 없었다. 은보가 출혈의 환상을 보자 그의 텔레파시에 의해 손 상병의 뇌에도 그러한 생각이 전달되어 역시 같은 환상을 보았다는 것, 그것은 은보 자신의 머릿속에 잠깐 스쳐간 생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북한군 병사를 쓰러뜨렸던 그런 내공이라면, 어쩌면 자신에게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
그래. 맞다. 나하고 손 상병님 둘이 내린 결론이 맞아. 다른 건 없어. 초능력 따윈 없는 거야. 은보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다시 부대를 떠나 열심히 강연을 하고 다니던 은보는 또 한 번의 휴가를 나갔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휴가였다. 이미 그에게 있어서 군대생활은 끝난 셈이었다. 가는 곳마다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귀빈이 왔다고 떠들썩하면서, 맨손의 라은보 이야기로 떠들썩했고 그는 그때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수색정찰 분대 대열에 끼어 걷다가, 잠깐 전투화 끈이 풀어지고, 조용히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끈을 묶고, 몸을 일으켰을 때, 수색대가 지나갔다고 안심하고 수풀에서 나오던 적병과 마주치고, 엉겁결에 적병은 방아쇠를 당기고, 거의 신기에 가깝게 몸을 옆으로 비틀어 피한 그는 적병에게 다가붙으며 가슴에 일격을 가하고, 동시에 뒤로 물러서 다시 자세를 갖춘다. 총소리에 놀란 대원들이 쫓아왔을 때에는 이미 적병이 땅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둔 상태이다.
짝짝짝!
몇 번이나 되풀이한 그 이야기를 새로운 청중들 앞에서 열심히 전개할 때면 몹시 감격한 그들은 아낌없는 박수세례를 그에게 보냈다. 결국 대통령에게까지 초청되어 말로만 듣던 ‘오찬’을 가지고 표창도 받고, 또 휴가를 나왔다.
어쩌면 이런 생활이 오히려 사회생활, 특히 따분한 직장생활보다는 백 배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생활방식 자체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영웅대우를 받지 않는가. 이른바 맨손의 라은보.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연결하니 주말이라 모처럼 이웃끼리 모여 놀이동산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곳에 찾아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보다는, 학교에나 가볼까? 하지만 그 역시 주말이라서 만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와 그의 주변을 감돌았다. 맨손으로 적병을 쓰러뜨린 영웅, 가는 곳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수많은 표창들, 그런데, 그런데 왜……. 원래 영웅이란 고독하기 마련인가?
어느새 그는 시장바닥의 복잡한 상가건물 사이를 걷고 있었다. 무심코 눈을 들어 보니 앞쪽 건물 2층에 피시방이 보였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잠시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온라인게임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그가 밖으로 나섰을 때에는 이미 날이 꽤나 어두워져 있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전철역으로 향하는 으슥한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와! 대한민국 육군일병 김 일병!”
누군가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지껄였다. 힐끗 돌아보니 깡패 몇 놈이 거기 서 있었다. 은보는 금세 주눅이 들었지만 억지로 가슴을 폈다. 그래도 명색이 맨손의 영웅 소리를 듣는, 육군병장 라은보인데.
깡패 하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뭘 봐, 새꺄? 떫어?”
아, 아니오!
마음은 그렇게 말했지만 입은 꽉 다물어진 채였다. 알량한 자존심의 한 가닥이 그의 입술을 단단히 꿰매어 놓고 있었다.
“이 씹새야, 어른이 말씀을 했으면 뭐라고 대꾸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빈정거리는 상대를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저놈들이 공격하진 않겠지? 만약 공격한다면? 죽어라 하고 전철역으로 뛰어야 하나? 아니면, 나 자신도 모르게, 그때 그날처럼…….
“하! 저 새끼가 이젠 들은 척도 않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너 군번이 어떻게 되냐? 난 제대한 지 오십 년이 넘었는데 이 씨발놈이 어디 하늘같은 고참 앞에서…….”
도무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기도 전에 잡힐 것 같다고 판단한 은보는 군대에서 배운 태권도 옆차기 동작으로 냅다 놈의 배를 내질렀다. 놈이 움찔하는 순간,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어느새 한 놈이 앞질러와 있었다. 상자더미 옆을 지날 때 갑자기 튀어나온 그놈이 발을 걸었고, 은보는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놈은 잽싸게 달려들어 은보를 걷어찼다. 그리고 멱살을 쥐고는 은보의 몸을 일으켜 팔을 뒤로 꺾었다. 그때 은보는 볼 수 있었다. 그놈, 처음에 시비를 걸면서 다가오던 놈의 손에 들려 있는 것!
“이 띨띨한 군바리 새끼가 어딜 감히!”
그 짧은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놈이 닥쳐왔고 파란 칼날이 한순간 빛을 발했다. 동시에 가슴에 느껴지는 격심한 고통…….
“씨발놈이…….”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리고 나서 놈은 칼을 뽑았다. 은보의 가슴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아찔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어억!”
갑자기 놈이 갑자기 심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으어어!”
“야! 왜 그래?”
기겁을 한 놈의 패거리들이 놈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은보의 팔을 잡고 있던 놈의 손이 스르르 풀렸고, 이어 겁에 질린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은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철역을 향해 냅다 달렸다.
다음날 텔레비전 아침 뉴스에서는 시장 뒷골목에서 거처불명의 불량배 하나가 죽은 사건을 보도했다. 경찰에 신고한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동료인 듯한 자들이 달려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군인 복장의 사내 하나가 재빨리 전철역 쪽으로 달아나는 것도 보았다고 했다. 경찰은 깡패들과 시비가 붙은 군인이 그 중 하나를 살해하고 달아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거 참, 은보 너도 조심해서 다녀야겠구나.”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아버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주방에 있어 사건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보는 힐끗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전날 밤, 그 사건장소에서 도망쳐 집에 돌아왔을 때, 은보는 자신의 옷이 엉망인 것을 깨달았다. 더러운 시장바닥에 나뒹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재빨리 군복을 벗어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아직 가족들은 집에 돌아오기 전이었다. 어머니는 얘가 웬 일로 자기 옷을 다 빨았다면서 이제 철이 들었나보다고 웃음 지었다. 휴우! 그 생각을 하면서 은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비전 뉴스는 이미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 있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전철을 안 탄 게 잘한 일이었어! 이미 경찰은 그 전철역에 설치된 폐쇄회로 감시화면 기록까지 뒤지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 깡패들로부터 도망칠 때, 아무래도 훤한 전철역에 있다가는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멀리 달아나 버스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놈들이 내 명찰을 봤다면? 은보는 제발 그 깡패들이 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과연 안 잡힐 수 있을까? 시장바닥에서 건들거리는 놈들이라면 대단한 조직도 아니고, 더욱이 놈들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과연 안 잡힐 수 있을까? 계속 그런 생각에만 매달리느라 은보는 그 깡패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놈이 왜 죽은 거지?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사실 그는 자신이 깡패를 살해한 것이 아니기에 살인죄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살인사건 자체에 연루된다는 것이 싫었고, 특히 대통령 표창까지 받고 영웅 소리를 듣고 있는 그가 뒷골목에서 깡패들과 싸움질이나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웠다. 그것은 엄청난 망신이었고 자칫하면 모든 것이 끝장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 마음이 정리가 되면서 놈의 죽음을 생각해 보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놈이 다가오고,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뿜어져 나간 피가 놈의 얼굴을 물들이고, 갑자기 놈이 발악을 하며 쓰러지고, 자신은 달아나고, 달아나면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몸은 멀쩡했다. 심장을 칼로 찔려 피가 뿜어져 나갔는데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만약 아침 뉴스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또 다시 환각을 경험했거나 혹은 잠시 정신을 잃고 꿈을 꾼 정도로 생각했을 터였다. 실제로 전날 밤에는 살인사건 자체보다는 그런 생각에 매달려 있었고, 오늘 뉴스를 보고서야 그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맞아. 분명히 난 놈들과 싸웠고, 갑자기 한 놈이 죽은 거야.
문제는, 놈이 갑자기 왜 죽었는가 하는 것.
며칠 후 은보는 그 시장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푹 뒤집어쓴 모자로 감추고, 최대한 군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약간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걸었다. 손에는 근처 상점에서 구입한 약간의 물건을 들고서.
분명히 경찰들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범인이 이렇게 뻔뻔스럽게 돌아다닐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지. 물론 검문을 받는다고 해서 그가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아니었다. 범인, 혹은 피의자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물론 있기는 하다. 그것은 바로 놈들, 쓰레기 같은 깡패 새끼들. 바로 내가 찾으려고 하는 놈들. 찾아서, 없애 버리려는 놈들.
그가 그런 마음을 먹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틀 전 밤이었다. 그때도 온갖 생각들로 머릿속이 무척 복잡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두 번도 아니고, 왜 자꾸 피를 쏟는 환상을 보는 것인가. 그리고 그 환상을 볼 때면 늘 누군가가 죽는다. 혹은 다친다. 혹시 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연필꽂이에 꽂혀 있는 커터 칼을 집어 들었다. 이걸로 그으면…….
그때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마치 그렇게 말리는 듯싶었다. 실제로는 들려오는 말소리도 없었고 머릿속에 울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은보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온몸이 그런 말을, 그런 뜻을 전해오는 듯했다.
누구?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음속으로 물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게 누구지? 다시 온몸이, 온몸의 피가 움찔거렸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피였다.
서서히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그렇게 말했거나 혹은 그의 머리가 그렇게 추정했다.
어떻게 해서,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피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공격으로 은보가 피를 흘릴 경우 그 상대방에게 보복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 순간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북한군 병사, 손 상병, 시장바닥의 깡패……. 그들 모두가 은보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쏟아져 나간 피는 그들의 몸과 접촉했고, 그들 몸속의 피와 대화를 나누었다. 소리 하나 없는, 침묵의 대화를.
만나서 반갑네. 나도 반갑네. 나는 바깥세상으로 나왔네. 여긴 아주 공기가 좋아. 그런가? 나도 나가고 싶군. 그럼 나오게나. 나갈 수가 없다네. 힘을 갖게나. 어떻게? 힘은 운동일세. 운동이 곧 힘이고. 마구 움직여보게. 벽돌은 움직임이 없어서 힘도 없는 것일세. 너무 규칙적으로 쌓였기 때문이지. 힘이란 불규칙에서 나오는 거야. 분자 하나하나, 원자의 배열까지 마구 뒤섞게나. 지금 그 고루한 배열이 자네의 힘을 빼앗아 가는 거라네. 그 분자들이, 원자들이 숨 막히는 배열을 깨뜨리고 자유를 찾았을 때, 그것이 힘이 되는 것일세. 힘은 자유일세. 그리고 자유가 힘이지.
상대방의 피는 그렇게 했고, 곧 유기물로서의 성질을 잃었다. 그것은 더 이상 피가 아니었다. 또한 그 피 아닌 피를 담고 있는 육체도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주검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피가 들려준 이야기, 혹은 자신의 뇌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실제로 피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믿고 싶기도 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북한군 병사, 그리고 시장골목 깡패가 그랬던 것처럼. 그 둘의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생각은 거의 긍정 쪽으로 기울었다. 피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결국 내가 죽인 셈인가? 하긴 그 북한군도…….
만약 그럴 경우 문제는 보다 커질 수 있었다.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답시고 아무 데서나 설치고 다니는 치기 어린 불량배, 영웅은커녕 오만으로 가득한 깡패나부랭이……. 어쩌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는 그 동안 누렸던 영예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물론 살인죄로 복역까지 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결심했다. 자신의 얼굴을 본 놈들을 모두 없애기로.
사건발생 당일로부터 여러 날이 지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어수선한 바닥의 특성 때문인지, 일단 정복 경찰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또한 사복형사로 느껴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잠복근무가 아니라 일단 그 패거리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고 다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먼저 찾아내야 돼. 어쩌면 그 놈이 내 명찰을 봤을 거야. 그 놈이 잡히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굳게 다문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문득 그 깡패들이 처음 나타났던 곳으로 눈길이 돌아갔다. 건물들 사이의 좁은 통로였다. 슬쩍 그쪽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온갖 잡동사니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사람이 지나다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경찰은 여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건이 터진 곳은 저편에 시장을 드나드는 차량들이 통행하는 길이었다. 거기서 이 상가 골목까지 들어와, 다시 건물들 사이에 나 있는 좁은 통로까지 경찰이 뒤질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그 건달들이 날이 어두워지고 상인들이 퇴근한 뒤에만 나돌아 다닌다면 경찰의 수사범위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놈들이 방심을 하고 나다니다가 잡히고 말겠지. 같은 패거리가 살해를 당했으니 경찰이 신원 정도는 파악했을 거야.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은보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마치 고물이라도 줍는 것처럼 바닥을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주웠다 버렸다 했다. 혹시 잠복경찰의 눈길이 있을지 모르기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건물 사이의 통로로 다가갔고 여전히 뭔가를 줍는 척하면서 더욱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건물 귀퉁이에 낡은 쪽문이 보였다. 하지만 일단 그것은 내버려두고 판자쪼가리 등 별 쓸모도 없는 것들을 주워 가지고 나와 어느 건물 한쪽 구석에 쌓았다. 감시자의 눈길이 미치지 않을 만한 곳에. 그리고 다시 그 통로로 오가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고 진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철저하게 해치워야 했다. 절대로 경찰에게 단서를 남겨선 안 된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통로로 들어가서는 낡은 쪽문에 접근했다. 아마 자신이 사라진다 해도 경찰은 별 신경을 안 쓸 터였다. 벌써 여러 차례를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흥미를 잃었을 테고, 또한 그가 안 보인다면 어느새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할 터였다.
쪽문은 쉽게 열렸다. 그 안은 어둠 그 자체였지만 자세히 응시해 보니 위로 통하는 비좁은 계단이 보였다. 계단 옆에는 폐쇄된 작은 문 하나가 있었지만 아마 점포 안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바로 앞에 보이는, 위로 통하는 계단 옆의 시커먼 공간, 그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은보는 그 지하실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발소리를 죽이고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내려가다 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문짝이었다. 살짝 손잡이를 잡고 문짝을 밀어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과연 이곳일까? 한순간 의혹이 달려와 자신에게 물었다. 여기밖엔 없어. 또 다른 자신이 대답했다. 피, 피가 느껴져. 피가 속삭이고 있어. 또 다른 피가.
문득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이어 나지막한 발소리. 분명히 놈들이다. 아니면 적어도, 또 다른 깡패 놈들. 하지만 다른 놈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지난번에 그놈들이 나타난 곳이 이 건물 옆 통로였으니까. 그리고, 피가…… 느껴진다.
은보는 재빨리 문 옆의 벽에 몸을 붙였다.
“니가 털어 와. 아쉬운 놈이 해야지.”
문 바로 안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야 이 새꺄. 어제도 내가 했잖아. 나만 뱃대지 고프냐? 니 뱃대진 아니고?”
다른 놈이 말을 받았다.
“에이, 씨팔!”
투덜거리는 소리.
“계단만 몇 개 올라가면 되는데 뭘 그렇게 말이 많냐, 새꺄?”
“어두우니까 그렇지, 씨발!”
“누군 안 어둡냐? 다 마찬가지야, 새끼야아.”
문이 덜거덕거리는 소리. 이어 소름끼치는 나지막한 소음과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은보는 재빨리 어둠 속에서 나왔다. 눈앞에 서 있는 시커먼 형체 둘, 그리고 그 뒤로는 흐릿한 불이 켜진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놈들이 깜짝 놀라며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미 은보는 놈들을 밀치며 안으로 뛰어든 뒤였다.
“째!”
한 놈이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
짧게 흘러나오는 신음.
“그 새끼 아냐?”
경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놈들은 발을 멈추더니 이어 천천히 다가왔다. 모두 세 놈이었다.
“이야! 이 군바리 새끼, 존나 겁대가리 없네?”
한 놈이 이죽거렸다.
은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과연 그것이 확실한가 하는 것, 그 생각뿐. 만약 확실하지 않다면? 어쩌면 죽음을 자초한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보는 자신의 느낌을, 혹은 자신의 ‘피’를 믿었다.
북한군 병사, 손 상병, 그리고 며칠 전에 죽은…….
“어쭈? 니가 똥폼 잡고 있으면 어쩔 거야?”
“뱃대지를 칼집으로 쓰고 싶냐, 새끼야?”
놈들은 쉽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입만 놀려대고 있었다.
그래. 칼, 내가 원하는 건 칼이다.
맨 뒤에 서 있던 놈이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놈들을 자극하기 위해 은보는 옆에 세워져 있는 장대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가 원하는 건, 칼이다.
순간 맨 앞에서 깐죽거리던 놈이 빠르게 닥쳐왔다. 어느새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은보는 막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기다렸다. 놈의 칼날이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오기를.
욱!
역한 신음이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자신의 귓전에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배에 죽음의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서 있었다. 어차피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진 것은 그놈이었다. 이어 그 뒤에 있던 놈도 약간 비틀거렸다. 은보가 뿜어낸 시뻘건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맨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놈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놈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이 떨고 이가 떨렸다. 그러던 놈은 갑자기 쇠파이프를 치켜들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어느새 피는 그쳐 있었다. 바로 앞쪽에 쓰러진 놈의 몸에 묻었던 피도 어느새 사라졌다. 아니, 되돌아왔다.
은보는 태연히 몸을 굽혀 쓰러진 놈이 떨어뜨린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그었다. 뿜어져 나오는 피. 쏟아져 나오는 비명, 비명들. 그것은 복수형이었다. 두 놈.
그리고 잠시 후, 은보는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온 은보는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인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돌아왔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세 놈, 깡패 세 놈이 순식간에 삶을 마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총이나 폭탄 같은 강력한 무기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총은 고사하고 칼도 쓰지 않았고, 아니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할 무기일 수도 있었다. 독가스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 맞아. 인간의 피를 순식간에 썩혀 버리는 것, 유기질에서 무기질로, 이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는 없지.
이미 그는 아주 위험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이른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인 셈이었다. 만약 그가 피를 흘릴 경우, 그리고 그 피에 누군가 닿을 경우,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죽음을 의미했다. 때로는 피가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쫓아가 공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주인, 혹은 숙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만 손 상병의 전례로 볼 때, 흘리는 피의 양에 따라 피해 정도의 차이가 있는 듯했다. 손 상병은 약간의 피만 묻었던 까닭에 빈혈 정도의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설사 적대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의 피가 묻을 경우 피해를 입는 것은 분명했다.
은보는 이를 꽉 깨물었다. 결국 난 앞으로 정말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 내 피가 절대로 누구에겐가 닿으면 안 된다. 그 상대가 흉악범이나 적군 병사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애꿎은 사람을 다치게 되니까. 따라서 누군가 고의적으로 나를 해치기 전에는, 절대로 피를 흘리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살아 있는 화학병기, 움직이는 살인무기이니까.
눈동자만 슬쩍 움직여, 책상 위의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손을 뻗어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누르고, 한 사이트로 들어가 아이디를 입력했다.
현란한 블로그 화면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북한군 병사를 잡아 첫 포상휴가를 나왔을 때 흥분된 마음에 만들었지만, 몇 개의 게시물을 올리다가 흥미를 잃어 중단한 블로그였다. ‘글쓰기’ 버튼을 눌러 입력 창을 열었다. 두 손을 천천히 키보드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를 두드렸다.
‘나는 고독한 영웅, 맨손의 라은보이다.’
그가 입력한 첫 번째 문장이었다.
구상 : 2005.05.28.
완성 : 2005.05.28.
뒷이야기 : 2008.07.15.
모처럼 소설을 폭발적으로 쏟아 내던 2005년에 쓴 단편 중 하나이다.
이 시기의 대량생산에 대해서는 작년 여름에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 있는데, 이 작품은 [육체의 반란] 연작에 속한다. 이 연작은 인간의 이런저런 신체 부위가 변형을 일으키고 어떤 경우에는 숙주(!)의 뜻과 관계없이 제멋대로 활동을 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요즘 뇌도 덥고 재미있는 일도(볼거리도!) 없어서 예전에 쓴 글들을 들추다 문득 이 단편을 다시 읽었다.
(사실은 엊그제 본 일본영화 <데스노트 3>에서 부분적인 설정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비슷해서 떠올린 것이다.)
이 단편은 완성했을 무렵에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출판 일을 맡아 하고 있는 이가 연락을 해 와서 계간지에 실을 단편이 부족하다며 긴급히 한 편이 필요하다기에 보내 주었는데,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해마다 출간되는 <올해의 추리소설> 2005년 판에 이 작품이 실렸던 것이다. 계간지는 어찌됐는지 신경을 안 써서 모르겠고(크학학!), 저 단행본에 실렸다는 사실도 작년에야 인터넷을 통해서 알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의 쓰지 않는 까닭에 그 출판업자가 연락을 해 올 때도 내 동료에게 연락을 해서 또 다른 사람을 거쳐 소식을 접했다.
출판업자 (전화)→ 멀리 있는 동료 (전화)→ 약간 가까이 있는 동료 (방문)→ 나
이렇게 된 것이다. 크학학!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이 단행본에 대한 독자들의 평을 읽어 보니, 내 작품에 대해 크게 평가가 엇갈린다. 하나는 가장 참신한 작품이라는 것. 그 독자는 다른 작품들 수준이 70년대, 심하면 5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평했다.
다른 평은 ‘괜히 읽었다’는 것이었다. 앞의 독자와 너무 평이 다른 점으로 볼 때, 그는 아마도 ‘정통추리’를 원하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탐정이나 누군가가 하나하나 단서를 찾아 범죄자를 밝히는 유형 말이다.
하지만 ‘추리작가협회’라고 해서 꼭 그런 글만 써야 할까? 어쩌면 그 독자는 추리물을 그저 셜록 홈즈나 콜롬보가 나오는 것으로만 한정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추리 장르는 영어로 ‘미스터리’라고 하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어릴 때 읽었던,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을 기초로 함)
정통추리 : 위에 설명한 대로. 일본에서는 ‘본격물’이라고 표현했던 듯하다.
하드보일드 : 마초 형사가 등장해 마구 쏘고 때려뉘는 액션물
스릴러 : 다들 알다시피 공포 분위기의 작품
범죄물 : 주인공이 범죄자인 것. 일본에선 ‘도서물’이라고 표현했다. 盜棲? 屠書?
경찰물 : 경찰들의 활약상을 다룬 것. TV 시리즈에 많다.
대충 기억나는 것만 열거해 보았는데, 내 작품은 주로 스릴러와 범죄물에 속한다. 애초 PC통신 공포/SF 게시판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귀신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인간 주제의 공포물을 많이 쓰다 보니 이런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 연작 중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나의―혹은 보편적인 한국 남자의― 특성에 가까운 듯하다. 다른 작품들은 보다 파격적이고 자극적이다. 세상을 저주하는 범죄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정상적인(?) 군인이 주인공이며,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사건이 발생하므로 가장 보통 사람의 인격에 가깝다. 다만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살인을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고, 작은 실수(?)를 감추려고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이 역시 가장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것이다.
예전에 나의 공포단편을 거의 백 편 가까이 읽어 본 추리작가협회 출판 담당자가 굳이 내게 연락을 한 것은, 내 작품이 ‘공포소설’을 표방하지만 추리적 성향이 무척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이 그들의 책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은밀한 진행을 좋아하는 까닭에 당연히 작품도 추리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내가 쓴 SF들도 거의 그렇다. 또한 단편의 ‘꽃’은 결말의 반전이다. 그러니 당연히 추리적 요소를 가질 수밖에.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작품도 결말에 파격적인 반전을 보여주는데, 하물며 범죄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단편들은 당연히 추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나는 단편소설을 주로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다. 그런데 이 연작은 모두 작가 시점으로 되어 있어 주인공의 이름을 표기한 부분을 읽을 때면 작가로서는 좀 낯설고 근지러운 느낌이 든다. 작가 시점이라고는 하지만 인물 심리를 집요하게 그리는 것이 내 단편들의 특징인데 주인공 이름을 표기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 시점에서 쓴 이유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편의 연작을 썼고 각각 주인공도 다른데 모두 일인칭인 ‘나’로 표현하면 전 작품을 두루 읽었을 때 느낌(주인공의 인격체)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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